설탕 마법사로서의 여정을 시작하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단 것을 정말 좋아했다.
밤중에 주방에서 코코아 파우더를 몰래 퍼먹다가 혼난 적도 있고,
동생이 내 사탕을 다 먹어버려서 엉엉 울기도 했다.
한번은 코코아 파우더를 물에 개어 냉동실에 얼리면 초콜릿이 될 거라고 믿고 실험을 했는데,
당연히 초콜릿이 되지는 않았다.
어릴 적의 나는 초콜릿을 먹을 때면 세상이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돌아보면, 아마 애정이 부족했던 시기에
혈당이 오를 때 느껴지는 그 짧은 스파이크를 ‘행복함’과 착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 진학도, 반도체 회사에 취업한 것도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어른들의 이해관계와 결정’에 따라 선택된 인생의 선택지였다.
그렇게 4조 3교대 근무를 하며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을 살던 나는
23살 무렵, 문득 너무 지겨워졌다.
공장의 스케줄에 맞춰 내 삶을 재단하는게
더 이상 의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즈음 사촌언니가 호주 워킹홀리데이 이야기를 꺼냈다.
그 한마디가 내 마음속 작은 불씨가 되었고,
‘유학을 가볼까?’ 하는 생각이 조심스레 싹텄다.
나는 원래부터 먹는 것과 레시피를 들여다보는 걸 좋아했다.
기숙사 생활을 했고, 회사 식당 밥이 늘 잘 나와서 직접 요리할 일은 거의 없었지만
퇴근 후엔 네이버 블로그에 올라오는 인기 레시피 글들을 몇 시간씩 스크롤하며 맛을 상상하곤 했다.
특히 베이킹 블로그를 보는 것은
내 안의 창작 욕구를 해소해주는 작은 즐거움이었다.
당시는 2010년대 초반, 유튜브가 아직 활성화되지 않았고,
모바일 환경도 불편해 영상 하나 로딩하는 데도 한참이 걸리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정보는 글과 사진으로 얻을 수 있었다.
지금 시점인 2025년 에서 보면 꽤나 아날로그 감성이다.
나는 교대근무를 하면서, 회사 복지 차원에서 운영되던 사내 전문 대학의 영문과에 진학을 했다.
상여금으로 받는 PI와 PS는 모조리 유학자금으로 저축했다.
고등학교를 채 마치지도 않은 채 입사한 SK하이닉스에서 5년간 일했고,
2015년, 드디어 1억 원을 모은 시점에 사직서를 냈다.
그리고 호주 멜버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인생 최대의 일탈이자,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한 첫 투자였다.
르꼬르동 블루를 선택한 이유
〰️
르꼬르동 블루를 선택한 이유 〰️
1. 한국에서 정보를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학교였고
2. 사내대학교에서 영어를 배워왔기에 영어가 그나마 편하게 느껴졌고
3. 드라마나 방송에서 자주 언급되던 유명한 학교였고
4. 초콜릿 전문과정까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단맛, 특히 초콜릿을 마음껏 탐구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르꼬르동 블루 제과과정을 선택했다.
솔직히 말하면, “유명한 학교만 나오면 그다음은 잘 되겠지” 하는 막연한 믿음도 있었다.
‘뭐, 안 되면 가게 차리면 되지’라는 단순한 낙관도 함께였다.
그곳에서 배운 시간들은
지금 되돌아봐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무스케이크에 글라사주를 코팅할때면,
실수할까봐 숨을 죽인채
그 반짝이는 유리빛이 오로라처럼 흘러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끓인 설탕 반죽에 공기를 불어넣어 만드는 설탕공예는
공기 속에서 피어난 조각난 빛 같았다.
그리고, 초콜릿.
누구나 가슴 한켠에 아련한 고백 하나쯤 품고 있잖아.
초콜릿을 대체할만한 고백의 메신저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강력한 사랑의 이미지를 가진 사기템.
남들에겐 감성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투박한 내 손끝에서 만들어진 그 찰나의 형태들은
무척이나 아름다웠고, 나를 벅차게 만들었다.
그 모든 순간을 내 손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한편의 판타지 소설 같은 경험이었다.
게다가 운이 좋게도,
수십장 뿌린 이력서 중 하나가 닿아서
‘Adriano Zumbo’ — 넷플릭스 시리즈로도 유명한 셰프의 디저트 가게에 취업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2년 동안 근무하며,
내가 꿈꾸던 커리어의 첫 단계를 제대로 밟았다는 확신을 느꼈다.
하지만 2019년, 한국에 돌아온 뒤
그 희망과 긍정의 에너지는 금세 고갈되었다.
수십 군데에 이력서 냈지만,
한국에는 내가 배워온 모던 디저트를 다루는 공간이 거의 없었다.
호텔은 애초에 지원조차 받아주지 않았고 (호텔은 인맥이 없으면 취직하기 힘들다),
제과점이나 프랜차이즈들은 “우리 가게는 그런 수준의 디저트를 하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이번엔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 지원했다.
“최신 조리기술과 플레이팅 디저트를 하는 곳이라면 조금은 열려있지 않을까?”
그렇게 처음 근무하게 된 곳이 바로 라쿠치나였다.
30년 된 이탈리안 레스토랑.
최현석 셰프님이 경력을 쌓았던 곳으로도 유명했다.
그곳에서 나는 레스토랑 디저트를 개발하고 생산하는 ‘디저트 셰프’로 일하게 되었다.
처음엔 기대와 중압감이 동시에 몰려왔다.
그리고 현실은 냉정했다.
레스토랑 경력도 없고,
트레이닝 해 줄 사수도 없이 단독으로 메인 디저트 셰프가 되어야 했다.
점심과 저녁, 3층짜리 레스토랑에서 식전빵과 디저트를 혼자 생산하면서
동료들과 소통할 기회도 없었던
나는 매일 실수를 반복했다.
티라미스 무스가 흘러내리고, 젤라토가 서빙 중 녹아내리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겼다.
빵 위에 덧가루를 안 뿌리고 굽거나
쿠프를 빼먹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들도 했다.
사고를 칠 때마다 주방을 돌아다니며 연신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였지만,
혹시라도 내 실수가 레스토랑에서 누가 될까 봐 죄책감이 들어,
사과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 때문일까 나는 계속 그곳에서 겉 돈다는 느낌이 항상 들었다.
“르꼬르동블루 나왔으니까 꼴통 블루냐?”
유학 다녀왔다며 조롱도 받았다.
디저트 주방은 다른 파트와 층이 달라 단절된 공간이었고,
어느 셰프는 다른 직원들이 내 주방에 나를 찾아오는 것조차 막았다고 했다.
부족한 실력으로 들어온 게 사실이라, 자격지심도 불안감도 컸다.
매 시즌 새로운 디저트를 발표할 때마다
사람들 앞에서 시식을 준비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심장은 두근거리고 손이 떨렸다.
원래 발표 불안이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그 불안이 매일 나를 갉아먹었다.
출근길에 자꾸 눈물이 났다.
슬프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는데 그냥 수시간동안 눈물이 흘렀다.
불안감에 잠이 오지 않아 매일 소주 한 병씩 마시고 잠들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차에 뛰어들면 끝나려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거울 속 내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고,
사람과 대화하는 게 무서웠다.
지하철에서는 숨이 막혀서 목깃을 늘이고 허리띠를 풀었다.
주방에서 문이 갑자기 열리거나, 누가 내 이름을 부르면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러던 어느 날,
성난 얼굴의 한 셰프가 내 주방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녀가 뭐라고 소리쳤지만,
그 순간부터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숨이 막혔고,
몸에 힘이 풀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고, 온몸이 떨렸다.
그날 나는 그대로 길바닥에 쓰러져 수십 분 동안 울었다.
의사 선생님은 그것을 공황발작이라고 했다.
진단명은 범불안장애, 외상후 스트레스에 따른 공황장애, 우울증, 그리고 알코올 의존증 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내게 말했다.
내가 어릴 때 나를 학대하던 사람의 모습을
지금 내 상사나 동료에게 투사해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즉, 과거의 감정을 현재의 사람들에게 그대로 겹쳐서 느끼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나에게 불만을 토로하거나 날카롭게 말할 때,
나는 성인으로서 대등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그때의 공포로 반응하는 거였다.
머리로는 ‘지금 이 눈앞의 사람은 그때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지만,
몸과 마음은 여전히 과거 속에 갇혀 있었다.
어릴 때 몸에 각인된 현상이 현재 사건과 동일시 되면서
나는 다시 그 시절처럼 두려워하고 움츠러들었다.
내 안의 시간은 아직 멈춰 있었던 것이다.